단상

공감영역과 소통

heesoofr 2024. 6. 17. 10:53

나이가 지긋한 이들의 친우관계를 보면, 중고교 또는 대학 시절에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과 여전히 소통하며 지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 대부분은 점차 멀어져 가고 현재의 직장과 관련된 사람들과 연락하며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중고대학 시절에는 친구 사이에 이익을 따지지 않고 공감 영역 안에서 소통하며 우애를 다지는 반면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현실적 환경에 의해 맺어지는 인간관계이다 보니 다소 형식적인 친분관계이기 때문에 직장을 옮기면 그 관계는 쉽게 단절된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드물지만 절친이 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고대학 시절에 친했던 이들과 왜 친분관계가 계속 이어지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 사이에서의 친분이 돈독해지려면 무엇보다 공감영역이 중요해 보인다.

대학생은 육체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성장기에 있으며 지적 영역, 감성, 가치관이 여전히 성장·변화 중이다. 따라서 수십 년이 지난 후에 만나면 각자의 변화량이 커져서 당연히 이질감을 느낀다.
지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감성과 가치관의 차이가 클수록 상대방이 낯설게 느껴져서 만남이 부담스러워질 수 있다.

누군가과 평소 잘 어울리는 경우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 직장 동료 : 공감 영역을 떠나 현실적 상황에 의해 맺어진 관계
  • 진정한 친구 : 이해관계를 떠나 가슴을 활 짝 열고 마음껏 소통하는 관계

그런데 직장 동료이면서 동시에 공감영역이 많으면 그야말로 절친이 될 것이다.

그러면 공감영역이란 무엇일까?
만약 누군가와 지적 호기심, 술, 담배, 여행, 등산, 음식, 음악, 영화, 소설 등등의 기호가 거의 일치한다면 최고의 조합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선천적, 후천적 독특한 특성을 지니기에 그런 이상적인 조합이 이뤄지기는 확률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 중 일부만이라도 잘 맞으면 친구로서 소통을 계속하여 이뤄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공감영역이 작으면 대화 중에 감성적으로 이질감을 느끼게 되며 소통에 대한 의욕이 점차 상실되어 연락을 자주 안하게 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중요한 얘기로 넘어가 보자.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존하여 행동하기 마련이다.
시간이 흐르며 성장하는 동안 이성의 역할도 비중이 높아지며 감성과 더불어 세상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세상을 알아간다는 마치 따개비가 바닷가의 바위에 다닥다닥 붙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에 편견의 따개비가 형성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식이 점차 차오르면서 대다수 인간은 편견에 휩싸이게 되고 자신의 편견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과 타인을 판단하기 시작한다. 대다수 인간은 자신의 생각이 편견임을 죽을 때까지 모른다.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은 더욱 깊어진다.
달리 말하면 자신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편견의 따개비의 두께가 더욱 두꺼워진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붙은 따개비는 스스로에게는 보이지 않는 반면 타인의 따개비는 눈에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나면 일상생활 정도의 대화수준을 넘어 깊이 있는 대화를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왜나면 자신의 생각이 맞고 상대방의 생각은 틀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어." 와 같은 생각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자식과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편견의 따개비로 감싸여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60대인 사람들에게 감상하기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고 물으면 20~30대에 듣던 노래를 예로 드는 경우가 많으며 지금 현재 유행하는 노래를 예로 드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과거에 집착하는 그런 성향 때문에 자식들과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꼰대가 되는 것이다.

만약 60대인 사람을 당장 20대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면 당연히 현재 유행하는 노래를 즐길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려 나름 노력하지만 감성적으로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며 새롭게 다가오는 감성의 물결을 거부한다.

현재의 노래만 듣고 과거의 노래를 듣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눈 앞에서 일렁이는 감성의 물결에 몸을 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세일 때 비로소 따개비가 떨어져 나가고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세대와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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